'토플 원정대'까지 등장… 눈물의 토플

 

 오전 7시 5분, 어학원 인터넷 게시판에 토플 접수 개시를 알리는 짧은 글이 올라왔다. “한국 떴어요!”

게시판은 아수라장이 됐다. “정말이에요?” “낚시 아냐?” “난 성공했음. 빨리 가서 신청하세요!” “난 안 보이는데?ㅠㅜ” 2시간 만에 접수현황을 중계하는 글 200여 개가 쏟아졌다. 응시 희망자들은 토플 주관사인 ETS사이트(www.ets.org)에 접속하기 위해 이른바 ‘광클’을 시작했다. 갑자기 폭주한 신청자들로 ETS 서버 접속은 거북이 속도가 됐다. 컴퓨터 환경이 여의치 않은지 “대리 접속해 주세요!”라는 다급한 글들이 올라왔다.

이날 오전 12시쯤, 4·5월 한국 정원이 꽉 차자 접수 창은 닫혔다. 희망 시험장소 접수가 마감되자, 등록 양도를 간청하는 응시자들의 글 수십 개가 올라왔다. 어떤 수험생은 “5일 동안 밤을 샜는데 오늘 하루 학원 가려고 잤더니…”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대학생 엄모(여·22)씨도 울상이 됐다. “다음 학기에 교환학생을 가려면 5월 안으로 토플을 꼭 봐야 하는데, 정말 큰일났어요”

‘토플 대란’이다. 토플 응시 희망자는 늘어나는 추세지만, 토플 시험방식이 지난해 9월 IBT로 바뀌면서 응시 가능 인원은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접수에 성공한 응시생들이 시험권한을 웃돈을 받고 양도하거나, 토플 해외 원정 시험까지 불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학을 준비하는 양모(29)씨는 “웃돈은 10만원에서, 많게는 50만원이 넘기도 한다”며 “토플 시험권한을 양도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토플권(權)’이라는 웃지 못할 신조어도 생겼다”고 말했다. 김지현(여·22)씨는 “어떤 학원에서는 알바를 고용해 대리 접수를 해주고, 그걸 판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해외로 시험을 보러 가는 ‘토플 원정대’도 등장했다. 회사원 김모(37)씨는 3월 말에 대만에서 원정 토플 시험을 치른다. 김씨는 “토플 시험 비용이 16만원에, 왕복 항공료 30만원, 숙박비 등을 합치면 한 번 시험 치르는 데 50만원 넘게 드는 것 같다”며 불평했다. 그는 “여름에 연수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리나라로 옮길 수 있다는 루머를 믿고 해외 시험을 택했다가 등록비 170달러를 날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 토플 응시자는 점점 느는데…

 ‘토플 대란’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때문이다. 토플 주관사인 ETS에 따르면 한국의 토플 응시 인원은 2000~2001년 8만3125명에서 2004~2005년 10만2340명으로 4년 사이에 2만 명 가까이 증가했다.

일단, 조기유학·어학연수를 포함해, 해외 유학생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2001년 15만여 명에서 지난해 19만여 명으로 5년 동안 4만 명 정도가 늘었다. 여기에다 특목고와 일부 대학 수시 전형 이른바 ‘글로벌 전형’에서 토플을 요구하고 있는 점도 큰 요인이다. 특히 ‘특목고’ 열풍이 불면서 자연스럽게 중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토플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L토플 학원 관계자는 “특목고 입학을 목표로, 미리미리 부모들이 토플을 준비시킨다. 꼭 특목고 입학이 아니더라도 토플을 해두면 손해볼 게 없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토익 점수 인플레가 심하다. 대신 토플은 나중에 연수나 유학을 갈 때도 유용하고, 아직까진 영어자격시험으로서 토플이 아직 경쟁력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 제한된 공급

시험장소가 늘어나야 하지만, IBT체제로 바뀌면서 거꾸로 토플 응시가능인원은 줄어들었다. CBT 체제에서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시험을 볼 수 있었던 것이, IBT체제로 바뀌면서 월2~4회, 한 회당 900~1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현재 국내에서는 19곳에서 시험 응시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 19곳도 센터 상황에 따라 시험 때마다 볼 수 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이 있다. CBT체제에서 1년에 10만 명 시험을 봤는데, 현재 시스템으로는 1년에 3만여 명만 응시가 가능하다. 3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ETS측은 조만간 26곳까지 장소를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다. 

시험 장소 확보가 어려운 이유는 기술적 특징 때문이다. CBT가 문제은행 식으로 계속 문제를 꺼내 출제할 수 있었다면, IBT는 시험은행이 따로 없다. 매 회마다 새로운 문제를 작성해야 한다. 게다가 전세계에서 인터넷으로 동시에 시험이 진행되는 특성상,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각 시험 센터와 계약을 체결하고, 거기에 맞는 장치를 설치해야 하는데, 이 부분이 여의치가 않다. 자연히 장소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한미교육위원단측은 "CBT방식과 달리, 시험 장소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며 "컴퓨터 수가 많지 않아서 자연히 응시인원도 줄어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ETS의 ‘게릴라식’ 접수 방식

토플 시험은 미국 ETS가 주관하고, 한미교육위원단이 각 시험센터와 ETS 사이의 협약체결을 중재한다. 2004~2005 전세계 토플 응시 인원 중 한국이 거의 20%를 차지했다. 한국 응시자가 짭짤한 수익을 약속하는 주고객인 셈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한국 응시자에 대한 대접은 그리 좋지 못한 상황이다. 

시험 장소 확보에도 거북이 발걸음이고, 접수 시기도 사전에 공지하지 않고 ‘게릴라식’으로 갑자기 접수창을 여는 방식을 택해 비판을 받고 있다. 박정 어학원 관계자는 “ETS가 사전에 접수일, 접수시각을 알려주면 언제 접수창이 열릴지 몰라 몇날 며칠 컴퓨터 앞에서 밤을 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런 식으로 하는지 저희도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일부 학원에서는 접수창이 뜨면 긴급SMS를 토플 준비생들에게 발송하기도 한다. 또 접수자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접수 모임’을 만들어, 돌아가면서 컴퓨터 앞을 지키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ETS측은 시험 센터와의 계약이 체결돼 자리가 확보되면 바로 접수창을 열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때그때마다 접수창을 열어 응시자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접수 시기를 사전에 알려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원자 폭주 방지'라는 납득가지 않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ETS는 2월 말 홈페이지에 “한국에서 응시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자리가 부족하다. 자리수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동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기 바란다”는 공지를 띄우기도 했다. 그러나 교환학생을 준비하는 엄모(여·22)씨는 “자리는 부족해도 좋으니, 접수 시기나 미리 알려줬으면 좋겠다. 열었다 닫았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라며 한숨을 내쉬었다.